조소희의 <아홉 개의 사다리>

이상윤 | 미술사/미술이론

1. ‘오래된 집’과의 화해

현대 미술가가 공간을 대할 때의 태도를 볼 때면, <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파멸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한 산티아고의 대사가 오버랩 되곤 한다.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의 몇몇 작품에서도 이러한 비장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만큼 작가들에게 있어 이 '장소(place)'가 중립적인 의미의 ‘공간(space)’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소희 역시 이 곳이 탐이 났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결론을 얘기하자면 조소희는 결국 장소와의 싸움을 내려놓았다. ‘파멸’과 ‘패배’를 애써 구분 지으려는 예술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오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곳을 장악하기보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작품화하는 것으로 화해를 시도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성북동 62-10, 11번지. 이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는 장소 특정성의 전형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스페이스 캔 역시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을 해석하고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과 흔적들을 작품으로 풀어냄으로써 또 다른 집을 생성해 가는 과정을 내보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정제된 화이트 큐브가 아닌, 80여 년의 성북동 역사와 주거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이 사연 많은 장소는 그 자체로 작품이다. 때문에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는 작가와 작품이 얼마나 이 장소에 녹아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것은 사실 오래된 집을 정복하는 것보다도 더 난해한 과제임에 틀림없었다. 거미줄, 곰팡이, 덜컹거리는 미닫이 문, 손바닥 만 한 마당과 그 한 켠에 서 있는 수돗가 등, 하나 하나 시간과 내러티브로 가득한 이 공간에 작품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녹아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 장소를 대하는 조소희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이 곳을 장악하려들거나, 애써 변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이 공간에 흡수되도록 작품을 최소화 했다. 왜냐하면 오래된 집이 가지고 있는 그 ‘오래됨’ 다시 말해 ‘시간의 축적’이나 그것에서 빚어진 ‘기억들’이 곧 조소희의 작품이었고, 또 실제로 그녀가 지금까지 지속해서 보여 준 주제였기 때문이다.

2. ‘나’ 된 것

“나는 이 가벼움과 무게의 중간쯤에서 자유로이 부유하는 형태를 존재의 모습이라 여기고 있다. 이는 늘 ‘의문형’이며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쪽에도 저편에도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극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어쩌면 양편의 구분자체가 불가능한 포괄적인 ‘중간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작가 노트 중에서)

2002년의 전시 『지영의 장롱』을 시작으로 연이은 전시들 『두 개의 방』, 『여행voyage』, 그리고 2012년의 『사(絲)적 인상』과 2013년의 『Salon de Hyaloplasm』전에 이르기까지 조소희가 그동안 보여 준 작품들에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지속성과 동떨어진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매일 조금씩 실을 짜서 길이를 늘여가는 띠, 날마다 한 구절씩 타이핑하는 두루마리 휴지, 또는 한 장씩 한 장씩 겹쳐져 이제는 제법 두툼한 두께가 된 하얀 종이 십자가까지 이전부터 조소희 작품은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오래된 집을 살리는 이 재생 프로젝트에 조소희가 초대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작품 오브제로서 이 낡은 집을 선택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을지 모른다.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장소 특정성을 내세우면서도 결국 그렇게 선택한 장소를 배경화하는 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비교하여 조소희는 장소 자체를 또 하나의 오브제로 선택하였다는 시각에서부터 출발점을 달리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공간과 작품을 타자화하는 것이 아닌 작품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동일시 또는 자기화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했다. 오래된 집에 켜켜이 쌓인 시간처럼, 조소희가 선택한 장소와 그곳에 흡수된 작품은 작가의 삶, 곧 조소희의 ‘나 된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도착하여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해야 하는 작업들, 심지어 전시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타이핑, 실 짜기 등의 ‘일상’을 지속적으로 작업해 왔으며, 오래된 집은 이러한 일상의 응축이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조소희의 작업은 특정 형태가 계획되어 있어서 완성의 단계로 종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반복 해왔던 일들을 축적한 ‘나 된 것’이 바로 작품이었다. 방식 뿐 아니라, 작품의 재료 또한 삶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루마리 휴지, 선물 포장용 습자지, 실, 초 등은 값 비싸거나 특별한 재료가 아닌, 연약하고 유한한 삶 자체를 보여준다.

3. 유한의 미학 그리고 자유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스펙터클하지도, 서사적이지도, 압도적이지도 않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illusion)을, 그것도 할 수만 있다면 근사해 보이는 환영을 추구하여 온 미술가들의 오랜 전통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실제적 삶’ 앞에 부인할 수 없는 회의에 부딪히게 된다. 환영이 더 스펙터클하고, 웅장하면 할수록 유약한 실재 앞에 그 거대함은 더 초라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소희가 선택한 재료들, 예를 들어 천 조각, 종이, 실 등의 물질성은 대개 가늘고 약하고 부서지는 한계를 가진다. 또 아주 작은 자극에도 더럽혀지고 흩어지고 찢어진다. 연약하고 낡아지는 실제의 삶과 같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의 유한함에 대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의 기저에 흐르는 감정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오히려 유한함이 가치를 더하여 준다.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존재에 가치를 부여한다.

조소희의 작품이 비관론으로 치우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시적인 아름다움과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 부피와 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어느 면에서 비물질적이다. 오를 수 없는 실 사다리, 신을 수 없는 거즈 신발과 드레스 또한 비물질적(dematerialization)이다. 하얗게 빛나는 사다리의 실들은 오래된 집 안까지 새어들어 온 가느다란 빛줄기처럼 보인다. 또한 조명에 의해 벽과 바닥에 생성된 실 그림자들은 우연적 드로잉이 된다. 견고하지 않으며 가변적이고 정형화되지 않은 조소희의 작품은 이처럼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자유롭게 유희하는 듯하다. 비물질적 요소가 보여주는 자유로움과 유희는 재료의 물질성이 나타내는 유한함과 약함을 신비와 시성(詩性)으로 바꾸어주었다. 작가는 이러한 즐거움을 본능적으로 체감하는 듯하다. 조소희가 특정한 형태와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 태도와 조급함이 없다는 것 또한 그가 재료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경계에서 이미 충분한 만족과 유희를 누리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바꾸어 말하면, 무엇인가 규정하고 추구해야 하는 부담과 피로함에서 탈피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아홉 개의 사다리

그런데 이번 전시 <아홉 개의 사다리>에서는 진행형의 삶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사다리의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하늘이 보이는 한 뼘 크기의 마당 한쪽 구석에 새빨간 사다리가 6미터 높이로 솟아 있고, 여덟 개의 어두운 방마다 실 사다리가 늘어서 있다. 디딜 수 없는 이 사다리들은 낡은 집의 벽만큼이나 소박하게 세워져 있다. 사다리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고정된 해석을 보류하였다. 그러나 사다리의 원래의 기능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 특별히 수직 이동을 목적한다고 보았을 때, 욕망과 고양, 또는 높은 곳으로의 방향성이나 또는 어느 곳에도 속한다고 볼 수 없는 진행 과정, 혹은 차례로 겪게 되는 단계(step)에 대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의미들 중 어떠한 사다리인지 상관없이, 이것은 기능을 박탈당한 사다리이며, 목적이 좌절된 사다리이다. 그러므로 이 사다리는 상승으로의 방향을 지시하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다. 이처럼 사다리 자체는 분명 목적과 이상이 될 수는 없지만, 아홉 개의 사다리들은 그러한 이상과 절대성이 존재함을 지시하고 있다. 때문에 거친 공간과 그 곳에 기대어진 사다리들은 단순히 고됨과 연약함이라는 이원적 대비가 아니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일상이자 동시에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이기도 하다. 좌절된 존재에도 불구하고 다다를 수 없는 방향으로나마 뻗어 가려는 ‘나’이며, 이 필연적인 좌절은 또한 역설적으로 절대성을 가리키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만든다. 오래된 집과 사다리, 그리고 ‘나’는 이처럼 유한한 존재, 좌절된 존재로서의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진행 중에 있고 계속해서 갈망한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규정하려 들지 않고, 목적과 결과를 고집스레 이루려 하지도 않는다. 스펙터클하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으며, 서사적일 필요도 없다. 이렇게 존재의 유한함, 좌절, 연약함을 가장 실제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면서, 과대 포장의 욕망도 스펙터클의 탐욕도 지성의 날카로움에서도 벗어나 한 없이 자유로울 수 있고, 유희할 수 있게 한다.

“내가 짜는 그물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멍들을 따라 그 ‘결’들을 음미하는 것이 존재를 인식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마치 발을 담그고 있는 강물에서 발가락 사이를 스치고 흐르는 물의 시원함, 간지러움, 그 물의 결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이는 머리를 짓누 르는강에 대한 사유가 아니고 물과 그 흐름에 관한 촉각적인 즐거움인 것이다.” (작가 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