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성을 향한 기꺼운 여정

김미정(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 혹은 사유를 주된 바탕으로 삼은 작품을 2022년인 지금에서 바라본다면, 그 지난한 무게에서 비롯된 지루함이 선행될지도 모르겠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질문하는 일에는 이제 슬슬 눈치가 보인다. 무거움을 견디는 건 간단치 않다. 그래서 오늘날 예술은 여러 역할과 이름을 가진 채 정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예술은 이벤트도 되었다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날뛰는 욕망과 교환의 대상도 되었다가 유행의 선두가 되기도 한다. 자연스레 예술은 스스로를 복제하거나 확산시켜 사각형의 LED 화면으로 갈음되어 실재를 대신한다. 예술은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대체되고 추앙과 혐오 혹은 무관심을 오가며 시대와 맞물려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과 태도를 변화시킨다. 모든 말과 이미지가 충격을 향해 진격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정체는 묘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소희 작가가 자신의 초기 작업을 개인전에 소환하겠다는 시도는 어떻게 비춰질 수 있을까. 그가 이번 공간:일리의 전시에서 소개한 <네 사람>(2009), <산/강>(2009), <리스트비얀카>(2013) 등의 작품은 작가의 최근 작업과는 달라 ‘보일’ 수도 있겠다. 섬세하고 유려한 근래 작업에 비해 초기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예술을 바라보는 작가의 고민을 강조하며 존재론적인 질문을 묵직하게 끌어안고 있다. 작업 연대기를 시간 순으로 나열했을 때 그 앞 쪽에 놓인 작품들이 가진 특유의 성김과 어색함도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들을 호명한다고 했을 때 흥미로웠던 지점은 작가의 초기작을 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로만 구성된 전시라면 이 전시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역으로 살필 비선형적 포털(portal)의 입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작가를 기억하게 된 특정 한 작품과의 조우가 아니라 한 작가가 예술을 고뇌하고 파고들었던 궤적이 어떻게 현재 시제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일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들을 통해 한 작가가 지닌 예술관의 중심(core)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예술 언어에 깊게 담금질되어 정제되지 않은 과거 시제의 작품들이 현재의 작품들과 호환되는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들여다보려 한다. 그래서 이 글은 작품의 연대기적 고찰을 지양하고 그의 과거와 현재의 작품들이 상호작용 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잇고 끊기: 생성과 소멸 사이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꿔 말하면, 조소희라는 작가가 전시에서 무엇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할까. 현재 시점에서 작가의 작품은 수행의 시간에서 비롯된 특유의 촘촘한 형식이 주된 특징이라고 얕게 요약할 수 있을 테다. 기다란 사각형 혹은 원형의 텍스트가 담긴 만 장의 편지를 쓰고(<편지_인생작업>(2007~)), 실이 중심이 된 작품들은 그들이 제작되기까지의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집약되어 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이 시각화되어 나타나는 작가의 작품에서 결국 ‘시간’은 주요한 키워드다. 매일 쓰는 편지가 쌓이고 손에서 시작된 작은 실들이 공간을 뒤덮을 때, 먼저 그 규모와 섬세함에 매혹되어 작품을 시적인 사유의 대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실상 이 작품들을 제작할 때 자신은 전혀 고요하지 않았으며 ‘반복’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상황을 벗어나고자 시도했던 몸부림이었다고 말한다. 고요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쉬이 잊을 수 없던 건 반복의 행위가 만든 단조로움만을 바라본 나의 편협함을 인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작가의 작품은 시간과 구조의 틀을 순순히 인정하고 번역한 결과라기보다 자신이 놓인 제한된 공간과 시간 사이를 예술적 실천으로 얽고 또 풀어내며 우리는 물론 우리를 둘러싼 존재들의 불완전성을 인지하려는데 더 가까워보인다. 하지만 그가 미완(未完)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무(無)의 귀결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외려 그 불완전함을 각성하는 순간을 통과하며 깨달은 공백을 어떻게 채워낼지를 찾아간다. 들뢰즈의 말을 조금 바꿔서 설명한다면 작가에게 시간이 상정한 제한은 매번 다르게 현행화되는 삶의 조건이자 실존적 방식이다.

그렇게 작가는 시간 등이 가진 일원화되거나 획일화된 언어의 방향을 지양하고 그 경계 밖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엇매어 스스로 소멸의 때를 결정한다. <리스트비얀카>에서 작가는 러시아 바이칼 호수 근처에 서 있는 나무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간다. 아마 우리가 영상에서 보는 것보다 작가는 좀 더 많이 걸었을 듯하다. 메마른 흙냄새가 나는 그 곳에서 마침내 마주한 나무에게 작가는 빨간색 실로 이은 연약한, 이불 혹은 옷 형태를 씌워준다. 단조로웠던 풍경에 거미줄 같은 붉은 실이 점점 덧대어지며 풍경은 색을 가진다. 그러나 실과 생명은 모두 유약하기에 그 장면이 영원할 것임을 장담할 수 없고, 그 실이 만들어낸 찰나의 그늘 또한 금세 스러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나누며 정적인 존재에게 동적인 생기를 부여하고 짧은 온기를 공유한다. 그렇게 영상은 끝나지만, 이 후 나무는 그 붉은 옷을 벗어야 할 것이며 작가는 다시 땡볕아래 긴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국의 공간, 나무가 서있는 마른 땅, 그리고 작가의 붉은 실은 서로 시간 아래 뒤엉켜 생성과 소멸을 이어간다.

그렇게 무에서 유를 이어보고 공유하고 지우는 과정은 <산/강>(2009)에도 드러난다. 작가는 정의와 확신으로 가득한 언어가 가득한 논문을 찢어 종이배로 접어 강에 띄워 보내고, 자신의 숨결이 담긴 풍선을 묶어 바람에 실려 보낸다. 종이배가 된 논문, 금세 공기가 빠져버리는 풍선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보다 그저 휘발된다. 사라짐에 대한 고찰은 <편지_인생작업>에서 좀 더 구체화된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편지들은 이미 만장을 넘긴지 오래다. 도서관에 쌓인 책들처럼 상당한 그 양과 무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언젠가 모르는 이들에게 이를 발송하여 자신의 손을 떠나길 희망한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이들이 이 뜻밖의 우편물로 인해 일상에서 쉬이 지각하기 어려운 감정과 경험을 마주하길 바란다. 규범의 밖으로 흩어지며 재생산되는 서사들. 그래서 작가에게 소멸은 삭제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이지러진 원을 인정하기

작가는 늘 예술을 정의할 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작품인 <네 사람>은 그를 실감할 수 있다. 유니세프를 후원하면서 선물 받은 구조용 덮개(couverture survie)모포를 둘러쓰고 사다리를 타거나 벽에 귀를 기울이고 초에 불을 붙이고, 죽은 생선을 자르는 행위는 존재론에 대한 탐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 예술은 그 답을 찾는 게 아닌 질문을 마주하는 일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특히 작가에게 있어 ‘대충 그린 원’은 그 전환의 주요한 계기가 된다. 수학적 산식이 도형으로 구현될 때 어떤 원도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건 불가능하기에 갖은 방법을 사용해도 우리가 화면에 그린 원은 늘 일그러진다. 이상적인 명제와 대상이 일치할 수 없음을 원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역으로 해석하여,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 반복되는 시도와 그 실패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여기에는 예술에 대한 질문을 찾겠다는 그의 여정 중 한 부분인, 공간:일리에 전시된 작품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들이 과거 작가가 대면한 문제에의 답을 갈구하는 기록이었다면, 이제 ‘일그러진 원’의 원리를 인지하고 답 대신 질문을 기꺼이 마주하게 만들었던 여정의 출발점으로 도치된다. 답을 구하려는 염원과 천착 그리고 질문을 대하는 태도는 과거와 현재의 작품을 결속시킨다.


소망하는 진리에 닿지 못한 낙공의 부스러기는 도처에 산재한다. 거기서 남겨진 연약한 언어들을 작가는 그러모은다. 작가가 늘 일상의 작은 언어와 섬약한 물질들을 껴안고 엮어내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매듭진 실들이 켜켜이 이루어낸 형상, 가녀린 나무에 뜨개옷이 씌워지며 하루하루 떠오른 언어들을 얇은 종이에 기록하는 편지들이 발송을 기다리는 시간들. 그들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앞서 언급했듯 사라짐이 곧 부재와 동격은 아니기에 작가는 흐르는 시간 끝에 도래할 마지막을 기다리는 대신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그들의 다른 이름들을 찾아낸다. 그래서 한 작품을 구성했거나 혹은 나머지로 치부되던 찌꺼기 같은 요소들을 다른 작품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그들은 다시, 다른 양상으로 호명되어 새로운 맥락을 획득한다. 그렇게 작가는 가변적이고 객체화된 상태가 미완성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진리와 체제가 보유한 절대성과 정의를 벗어나 다른 언어를 취할 열린 가능성의 기회임을 역설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 제목을 《사다리, 귀, 칼 그리고 촛불》이라고 했다. 모두 한 번쯤 작가의 작품에서 만난 대상들이다. <네 사람>과 <아홉 개의 사다리>(2014)에서의 사다리, <네 사람>과 <비과학적인 촛불의 시학>(2013)의 촛불. 그들 각각이 지닌 같지만 다른 모습과 이름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다다를 수 있다면 그간 겸연쩍어 회피해 온 예술을 묻는 일을 다시금 해볼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 자체가 아니라 몰랐던 그들의 틈을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소희 작가의 예술 여정은 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