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처럼 뻗어간 길에서,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하기 : 조소희의 그물코 미학
김종길 | 스스로 쓴 에세크리틱 대화록
1. 조소희의 미술세계로 이어지는 네 개의 아포리즘
사유의 중심에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산인 몸이 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우리들의 발에는 뿌리가 없다.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_ 다비드 르 브로통,『걷기 예찬』 중에서
흔적은 하나의 사라짐에서 다른 사라짐으로 가는 종결되지 않는 이동이다. 종이 위 빈 중간에서의 펜의 독특한 – 그러나 무한한 – 놀림처럼.
이 이동은 결코 정확하게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끝이 없다. 언제나 그것의 무엇인가가 있고 또 이미 더 많은 그것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더 많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미 있고 또 아직도 어떤 것이 남아 있다.
_ 장 뤽 낭시,『흔적들』 중에서
백지는 신성한 근원이다. 그곳에서 온갖 잡념은 물론, 모든 기획과 사상이 발원한다. 그것은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수많은 의미들을 발산하는, 안개에 묻힌 숲과 같다. 이상하게도 백지에 무엇을 그리거나 기록하면 금방 신성한 아우라를 상실하고 만다. 더불어 바로 세속적인 평면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_정희승,「백지에 대한 지질학적 탐구」 중에서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불의 생성은 모든 생성 가운데서 가장 극적이며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불에서 그것을 상상한다면 세계의 걸음은 빠르다.
_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중에서
2. 초의 불꽃
바슐라르는 그의 마지막 저서 『촛불의 미학』에서 촛불은 고고하게 타며 그 붉은 불꽃은 반듯하게 산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서 그는 계속 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불꽃의 원초적 영상을 두고 스스로의 위를 날고, 그 첨단을 넘어 새로운 비약을 붙잡는 불꽃이라고도 했지요. 그는 불을 살아 생동하는 실체로 인식한 듯해요. 조소희의 전시 공간에도 촛불이 있지요. 큰 동굴과도 같은 공간에 들어서면 촛불 하나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마치 그것은 우리를 안내하는 안내자와 같아요. 왜 그는 그곳에 촛불을 켜 두었던 것일까요?
바슐라르에게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그는 아주 쉬운 예를 들고 있어요. 예전부터 촛불의 불꽃은 현자들을 사색하도록 했지요. 고독한 철학자들에게 많은 몽상을 주었던 것이에요. 그들의 책상에 놓여있는 책들 앞에서 촛불은 끝없는 사상을 불러일으켰고 또한 영상을 길어 올렸죠. 불꽃은 그 때 세계의 몽상가들에 의해 세계의 현상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조소희의 촛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촛불은 아주 소박합니다. 큰 통나무에 촛대를 세웠으나 갓도 없고 그저 촛불뿐이지요. 그는 마치 촛불이 촛불형상의 전기등인양 전깃줄을 늘여서 구멍도 없는 벽에 콘센트를 꽂아 두었으나, 그것은 “하나의 불꽃 속에 세계가 살아 있는 것인가?” 혹은 “불꽃은 하나의 생명을 갖는 것인가?”를 묻는 물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통나무 위의 불꽃이라는 것도 무언가 의미심장합니다. 석도는 『苦瓜和尙畵語錄』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아득한 옛날에는 법이 없었고 또한 큰 통나무는 흩어져 있지 않았다. 큰 통나무가 한 번 흩어지니 법이 세워졌다. 법은 어디에서 세워지는가? 일획에서 세워진다. 일획이란 것은 존재의 바탕이자 만물의 근원이다.”라고요. 통나무가 한 번 흩어지면 법이 선다지요? 일획에서 세워진다지요? 그 일획이 존재의 바탕이요, 만물의 근원이라지요? 그렇다면 촛불이 서 있는 조소희의 통나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혹 그것도 또한 존재의 바탕이며 만물의 근원인가요? 촛불의 빛을 그 바탕으로 환하게 흩어지게 하려는 일획의 속셈은 또 아닐까요?
신석정의 촛불을 본 적이 있나요?
신석정의 촛불이라고요?
그래요. 신석정의 촛불. 그는 바슐라르보다 먼저 촛불의 미학을 탐구했던 시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촛불을 켜야 하는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밤이 오기 전, 그리고 황혼이 떠나기 전 같이 내 작은 방안의 풍경이 가장 절경일 때는 없지요. 이 풍경들이 사라질 무렵에 나는 촛불을 켠답니다. 그러면 갑자기 이것들은 나를 다시 찾아와서 내 앞에 펼쳐져요. 황혼의 명상이 내 생활의 큰 일과이듯이 촛불을 켜는 것도 밤의 큰 일과인 것이죠. 촛불은 전기나 석유 불처럼 죽은 불이 아니에요. 가벼운 바람이 방안을 스칠 때마다 촛불은 예민하게도 흔들 줄을 알고, 연방 녹아갈 때 고적한 솔숲에 들어선 듯 그윽한 향기도 나지요. 촛불이 가는 곳은 모두 솔숲처럼 적막하고 고요한 곳이에요. 심원한 사색의 밤, 거룩한 슬픔의 밤이 아니면 촛불을 놓지 않아요. 인생에는 언젠가는 거룩한 슬픔의 종막을 내릴 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종막이 오기 전에 우리는 심원한 사색을 쌓아야 할 것이에요. 저 촛불 아래에 앉아서 말예요. 바로 그 때가 촛불을 켜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그렇군요. 촛불을 켜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의미를 얻는 순간이군요. 그 순간을 견뎌야 만 촛불의 존재로부터 숱한 이미지의 몽상을 피워 올릴 수 있는 것이군요.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중에서
3. 하얀 십자가
촛불 뒤에 걸린 하얀 십자가는 어떤가요? 녹십자 적십자를 부르는 방식대로 부른다면 그것은 ‘백십자’일지 모르겠어요. 생긴 것도 그것들과 똑 같잖아요? 그런데 그의 십자가는 어딘가 허술하고 가벼워요. 한 없이 가벼운 종이들을 오려서 덩어리째 걸어놓은 십자가라니, 그것은 마치 정육점에 내걸린 고깃덩어리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때때로 그것은 아주 섬뜩합니다. 그 앞에 서 있는 촛불과 한 몸이 될 때는 무엇으로도 해석될 수 없는 어떤 미궁 같기도 해요. 촛불에 기대어 십자가를 보고 있노라면, 말없이, 복잡한 혼돈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죠. 하얀 십자가는 현기증을 일으켜요.
모든 백지의 본문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시인은 말하더이다. 어설픈 글로 그 본문을 오염시킬 뿐이라면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하다오. 어쭙잖은 글로 순백의 성역을 털끝만큼도 더럽히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두는 것뿐이라오. 탄생과 동시에 완성된 본문은 저 홀로 찬연히 빛나도록 놔두고 그저 우리는 주석만 달면 되는 것이오. 그것만으로도 큰 영예가 아니겠소? 그런데 사람들의 욕망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소. 백십자의 십자가 또한 녹십자든 적십자든 그런 류의 십자가들의 하위 주체일 따름이오. 주석은 본문을 세속화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미 백지의 본문은 세속화 되어 있을지 모르오. 아무도, 그 누구도 백지를 백지로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조소희는 종종 그 백지 위에 글을 쓰더이다. 그런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오?
활자는 백지에서 발아하는 싹이라고 할 수 있소.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글의 씨외다. 몽상과 사색의 구름이 백지 위로 지나가며 잉크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글의 씨에서 싹이 움트는 것이지요. 문자의 파종, 백지에 봄이 오고 설원은 이내 녹지로 변할 것이며, 새들이 활자의 숲에서 즐겁게 지저귀게 될 것이오. 활자는 동물성 유전자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개미의 DNA와 그 구조가 유사하지요. 활자는 여왕개미에 해당하는 로고스의 지배를 받는데, 사고의 페르몬을 따라 논리와 문법을 준수하며 줄을 지어 다닌 것이 그 증좌요. 그런데 조소희는 글의 씨나 문자의 파종에는 관심이 있으나 로고스의 지배를 벗어나 있지요. 사고의 페르몬 따위를 따르지 않아요. 그는 그저 문자의 모음이나 자음, 문자 사이를 떠도는 부호들과 때때로 그의 뇌리를 스치는 짤막한 어휘들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오.
백지는 그 힘이 매우 약한 사물이에요. 구겨지기 쉽고 간단한 끼적거림에도 순수성이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죠. 사물은 자신을 계속 유지하려는 힘을 내재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힘의 내재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려고 한다. 조소희의 경우도 그런 게 아닐까요?
시작으로 돌아가 보시오. 백지는 신성한 근원이라고 했소. 그곳에서 온갖 잡념은 물론, 모든 기획과 사상이 발원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지에 무엇을 그리거나 기록하면 금방 신성한 아우라를 상실하고 말아요. 세속적인 평면으로 환원되어 버린단 말이오. 자, 저 하얀 십자가는 무엇이겠소? 저것은 순수한 것이오, 아니면 세속적인 것이오? 우리가 저것을 ‘백십자’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이미 순결을 상실하게 될 것이오. 말의 씨가 그것을 더럽혔으니. 그러나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의 씨를 또한 다 더럽다고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소. 말이 되지 못한, 문자가 되지 못한 문장부호들이 떠도는 세계에서는 더더욱.
4. 리스트비얀카(Листвянка), 외로운 나무 한 그루
이 세계는 사전이 정의하는 사물들로 가득하나 사전의 언어만으로는 낮과 밤의 크기조차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사전은 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것은 명사이며,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 해살이 식물로서 집을 짓거나 가구와 그릇 따위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목이라고. 그 나무의 세목은 또한 셀 수 없이 많아서 사전은 다시 그 세목의 이름들을 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소나뭇과의 모든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소나뭇과의 상록 침엽 교목이며, 높이는 35미터……. 이런 방식이죠. 소나무를 황금소나무니, 황장소나무, 금강소나무로 나누어서 그 특징과 쓰임을 열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전적 의미만으로 나무의 세계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도 분간하기 어려운데, 수 백 수 천 년을 산 나무의 세월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동아시아의 오래된 지혜와 미학을 표현하는 말로 세한삼우(歲寒三友)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는 세 벗이란 뜻으로 소나무 ․ 대나무 ․ 매화나무를 말하지요. 그 말과 세 나무의 뜻에는 동아시아인들이 ‘견뎌 온’ 상징체계가 숨어 있어요. 삶의 철학으로 깊게 침윤되어서 너울거리는 그 나무들의 뜻은 지조 ․ 절개 ․ 은일 ․ 탈속 ․ 우의 ․ 신의 ․ 겸허 ․ 도덕과 같은 것들입니다. 나무에 깃들인 그 뜻의 세계가 동아시아인들이 지향했던 이상이어서 누구나 그 뜻의 가치를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살았죠.
나무를 나무라고만 부르는 것의 단편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겠습니다. 또한 나무들의 뜻에는 심오한 상징이 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굳이 그것을 길게 이어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 한 시인의 시가 있어요. 시인 채호기의 시집 『수련』에 실린 시편들이죠. 시집의 표제어이자 이 시집 전체에 깔려 있는 주제어로서 수련은 쌍떡잎식물 수련목 수련과 수련속 식물이겠으나, 채호기의 수련은 시인이 시의 언어로 밀고 가는 미적 대상일 따름입니다. 문학평론가 고종석은 채호기의 ‘수련’을 두고 관능의 물너울이 넘실거리는 여름의 열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자, 보세요!
그 여름날, 내가 너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았어야 했다, 너를 사랑하기 전에.
나는 흙을 딛고 서 있고
수련, 너는 물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을
- 채호기의 「수련」 중에서
너의 몸은 보이지 않아. 그러나 너의 몸의 미세한 부분을 확대하면 거기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 너울거리지
- 채호기의 「공기1」 중에서
「수련」에서 ‘나’는 흙을 딛고 서 있고, ‘너’는 물을 딛고 서 있어서 둘은, 둘의 사랑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흙을 딛고 선 ‘내’가 보는 ‘너’의 몸은 보이지 않고 그저 물 위에서 너울거릴 뿐이지 않습니까? 그 너울거림의 그리움을 표현한 시적 표현이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시의 상상력으로 밀고 들어가 그 둘의 사랑을 가능케 하는 세계를 열고 있어요. 시인이 “수련 꽃잎의 테두리가 너를 끌어당기고/ 수련을 둘러싸고 있는 네가 흰 꽃잎을 끌어당기고/ 아, 이 탱탱한 탄력!”이라 표현했을 때, ‘나’와 ‘너’는 이미 발가벗은 육체로 뛰어들어 꽃잎실로 짠 꽃천들과 너울거리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련은 또 웬 말입니까? 나무를 나무라 하지 못하는 데에서 상징의 기표를 따지는 것이라면, 그것도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수련은 갑작스러운 데가 없지 않군요. 나무에서 수련까지 긴 상징과 해석을 단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요?
조소희의 작품 <리스트비얀카>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영상작품 <리스트비얀카>는 11분 16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영상이지만, 실제로는 그가 5시간 아니 6시간 가까이를 걸어가 작업했던 작품이지요. 그가 차창 밖으로 본 그 나무를 만나기 위해 걸어야 했던 시간들과, 그 나무와 더불어 실뜨기 했던 순간들은 그저 한 나무와 작가의 이야기로 간단히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그 나무는 바이칼 호수의 초원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침엽수였으나 ‘위 하늘의 무당나무’였소. 조소희는 그 무당나무와 채호기식 “관능의 물너울이 넘실거리는 여름의 열기”를 나눴던 것이오. ‘나’는 초원에 발 딛고 섰으나 ‘너’는 대지에 뿌리박고 서서 ‘나’를 맞았던 것이외다. 조소희는 거기에 갔고 다시 돌아 왔으나 나무는 그저 바이칼 호숫가에 박혀서 너울거릴 뿐 아니겠소? 그 너울거림의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조소희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인양 붉은 실의 그물코를 짰던 것이오.
그러니 조소희의 세계는 나무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나 수련을 그리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군요. 그런데 그의 미술세계에 등장하는 실, 실타래, 종이, 종이타래, 촛불, 촛불 받이, 테이블, 의자, 실뜨기, 실그물을 비롯해 걷기와 걷기 수행, 실뜨기와 실뜨기 수행, 타자와 타자치기 수행 등의 일련의 수행성 행위조차도 그것들로부터 이어지는 다른 세계의 언어를 찾지 못하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 생각합니다. 조소희는 그의 미술세계를 오랫동안 엮어오면서 스스로 정의한 일종의 ‘조소희 미학사전’의 언어들을 구축한 것 같아요. 그것은 마치 시어와 시행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시편을 닮았다고 볼 수 있죠. 달리 말하면 그 시편은 읽기 쉬운 문자언어가 아니어서 종종 이미지 언어로 바뀌거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무언극의 형식을 띄는 듯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어쩌면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사용해 온 문자언어의 체계를 가만히 내려놓아야만 할지 모르겠어요. 나무는 나무라고 부르는 어떤 나무이면서 동시에 나무의 한 상징이고, 그가 자주 보여주는 실뜨기의 그물 또한 그물이라 부르는 어떤 그물이면서 그물의 한 상징일 뿐이니까요. 우리가 조소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가 비추는 한 세계를 보아야만 할 터이고, 그물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그 그물이 투영하는 세계의 창(窓)을 보아야만 하겠지요.
그렇소. 그래서 이 글은 “너의 몸은 보이지 않아. 그러나 너의 몸의 미세한 부분을 확대하면 거기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 너울거리지”라고 황홀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조소희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소. 또한 이 글은 조소희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대화록’에 다름 아니오. 즉 이 대화록은 하나의 물음과 대답이면서 동시에 그 전체가 물음일수도 있고 대답이기도 한 수미쌍관(首尾雙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음을 지우는 대답은 있을 수 없고 대답으로 완성되는 물음도 존재하지 않을 터. 조소희의 사유가 파고드는 미학적 수행은 그 물음과 대답 사이일 것이오. 그는 마치 시계추처럼 있을 수 없는 대답과 완성될 수 없는 물음 사이를 오갔으니까. 수 만 번의 그물코를 통해 ‘그물-짓기’하는 그의 작품들은 그러므로 아직,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오.
5. 걷기의 사유
순전히, 한 사람이 걷기만을 위해 걸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걷기에는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철학적 깊이가 있다고도 생각해 봅시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의 걷기와 걷기의 무게에 담긴 철학적 깊이는 무엇일까요? 걷기와 걸음의 무게와 철학적 깊이, 과연 그것들은 서로 의미구조를 나누면서 행복한 삼각형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래 걷는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 걷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의 부동(不動)이 아니라 평정심이지요. 걷는 사람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거처를 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걷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의 의무를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걷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길은 구체적인 걷기의 체험을 통해서 아니 그 혹독한 고통을 통해서 근원적인 것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에서 비켜나 멀리 떨어진 내면의 길을 열도록 돕는 것이지요. 다만,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철학은 완성될 수도 있습니다.
걷기는 집의 반대라고 하더군요.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라는 것이죠. 우연히 어딘가를 향해 내딛는 걸음걸음이 한 인간을 떠돌이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 집도 절도 없는 인간으로, 구두 밑창이 닳도록 어느새 저만큼 떠나버린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구요. 이 세계는 어쩌면 바로 그가 저녁마다 잠자는 한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처럼 뻗어간 길, 오솔길처럼 꾸불거리는 선(線)의 한 과정에 불과할지도 모르구요. 당신에게 걷기는 무엇입니까?
생각의 풍요는 걷기에서 출발하지요. 걷다보면,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답니다. 때때로 나는 손으로만 글을 쓰지 않아요. 내 발도 항상 한 몫을 차지하죠. 들판을 가로질러서 종이 위를 걸어서 말이에요. 언덕을 올라가 봐요. 길에도 근육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바쇼의 시를 보시오.
이내 한 해의 끝이 되었고 또 봄이 돌아오자 가벼운 안개 속을 지나 시라가와의 울타리 저 너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나는 찢어진 바지를 꿰매고 모자 끈을 손보는 즉시 쓰시마의 달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
- 일본 하이쿠의 대가 바쇼의 시
그렇군요. 바쇼의 시에는 가벼움의 싱그러운 미학이 있군요. 조소희가 걸었던 바이칼 호수의 주변에는 여러 개 의 길이 있더군요. 처음엔 하나였다가 두 개 세 개가 되고 다시 하나가 되는 길들이 초원 저 너머로 이어졌고요. 그쪽 사람들은 그 길에 ‘상처받았다’는 뜻의 말을 붙여 사용합니다. 길의 이름이 ‘상처 받은 길’이라는 뜻이죠. 누군가 그 길 옆으로 새 길을 내기 시작하면 상처 받은 길은 곧장 ‘치유 되는 길’의 이름으로 바뀝니다. 걷기에는 상처와 치유의 의미가 동시에 있는 듯해요. 우리는 그가 걸었던 길에서 무엇을 사유할 수 있을까요?
발자크는 『걷기 이론』에서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인류가 첫발을 내디딘 이래 왜 걷는지, 어떻게 걷는지, 걸어본 적이 있는지, 더 잘 걸을 수 있는지, 걷기를 통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 자문해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정말 굉장하지 않느냐고 말예요. 그는 이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철학적, 심리적, 정치적 시스템과 걷기가 연결돼 있는 질문들이라고 본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한 작가의 걷기를 그런 질문들에 연결해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에요. 발자크의 말은 문학적이기 이전에 지나칠 정도로 열정에 가득 차 있어요. 오히려 나는 조소희 작가의 걷기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Walking’를 본답니다.
소로의 걷기요? 그게 뭐죠?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하더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가장 어두운 숲, 가장 탁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도시인들이 가장 음산하게 느끼는 늪을 찾는다오. 나는 성스러운 장소, 지성소로서의 늪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힘이, 자연의 정수가 존재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소로의 말은 노자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가 쓴 도덕경에 이르기를 “온갖 것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거든.
그렇다면 조소희가 바이칼 호수의 한 나무를 향해 걸었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몽골 북부 원시림에 ‘무당나무’라고 불리는 나무가 있답니다. 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뚜렷이 구별되지요. 하늘을 찌를 듯 곧고 높은 아름드리나무지만 가지가 많지 않아 키만 홀쭉해요. 그런데 그 중 유별나게 웃자란 어떤 가지 부위에 갑자기 무성히 자란 잎이 뭉쳐서 둥글게 얽혀 있는 게 있다오. 나무 꼭대기에 나타난 것도 있고, 중간에 있는 것도 있으며, 아래가 그리 된 것도 있지요. 위가 그런 것을 ‘위 하늘의 무당나무’라 하고, 중간이 그러면 ‘이승의 무당나무’, 아래는 ‘저승의 무당나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3세계(三世界)’라고도 하고요. 세상이 ‘상․중․하’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상계(上界)는 순수하고 순결하며 슬픔이 없는 세상으로 위대한 수호신과 같은 선신(善神)이 존재하는 천국[디와징 어롱]입니다. 상계는 중계에 살고 있는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며 하계의 악신과 끊임없이 싸워요. 중계는 인간이 사는 곳이랍니다. 하계는 죽음과 암흑의 세계로, 전염병 같은 질병을 퍼뜨리는 역신(疫神)들이 온갖 음모를 꾸미는 곳이에요. 그런 하계를 일컬어 ‘지옥의 나라[타밍 어롱]’라고 합니다. 조소희의 나무는 위 하늘의 무당나무를 닮았어요. 그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다.
어떤 한 소년이 죽은 나무 한 그루를 그 호숫가에 심었다오. 소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매일 그 나무에 물을 주었지. 그렇게 3년이 지났을 거요. 어느 날 소년이 양동이 가득 물을 들고 낑낑 거리며 그 나무에게 가지 않았겠소?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아니 글쎄 그 죽은 나무가 꽃을 피운 것이오. 그 후로 나무는 그곳에 홀로 세월을 견디며 살아 온 것이오. 조소희는 새벽부터 그 나무을 향해 걸었다 하오. 5시간 아니 6시간이 다 되어 바이칼 호숫가의 나무에 도착했지요. 그리고 그 나무로부터 그는 중계, 하계로 이어지는 그물코를 짓기 시작했어요. 왜 그가 붉은 실로 그물코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다만 상계에서 중계로, 다시 하계로 나풀거리는 그물코의 세계를 통해 삼계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이어보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할 뿐이오. 그것은 마치 위 하늘의 무당나무가 두 번째로 꽃피운 것과 다르지 않아요.
6. 그물코
갤러리 살롱드에이치는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1층의 작품들에 대해 따져 물었습니다만, 이제 그곳으로부터 2층으로 이어가야 할 듯합니다. 2층은 무엇보다 천장을 세 겹으로 둘러 싼 그물코에 있다고 봐야겠지요?
이미 우리는 조소희가 사유해 온 것들에 대해 많은 것을 나눴소. 말의 씨를 틔워서 말의 숲을 만든다고 해서 조소희의 세계를 더 많이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다만 우리는 그가 2층에 제시해 놓은 어떤 극적 상황에 대해 물어볼 필요는 있을 듯하오. 나는 그가 1층 공간을 ‘관람형’ 작품들로 배치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1층은 관람형 공간연출이었단 이야기요. 촛불과 백십자, 초를 담아놓은 실크봉지와 화면 가득 펼쳐지는 영상작품 <리스트비얀카>. 그런 다음 검은 계단을 걸어서 2층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올라가면서 관객은 천장을 수놓고 있는 그물코에 압도당하게 되지요.
2층에 설치한 작품들은 개별적이면서도 개별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줍니다. 서로 각각의 장면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무언가 그들의 관계를 강하게 이어주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 느낌을 뭐랄까, 그러니까 그것은 거대한 그물코의 세계 내 존재들처럼 보이더군요. <리스트비얀카>를 보고 난 뒤의 체험이라서 그 느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리스트비얀카>와 2층의 세계는 곧장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손에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아요.
조소희는 불현 듯 ‘3세계(三世界)’의 이치를 깨달은 게 아닐까 싶어요. 앞에서 설명했듯이 세상을 ‘상․중․하’로 보는 것이죠. 순수하고 순결하며 슬픔이 없는 상계(上界), 인간이 살고 있는 중계(中界), 죽음과 암흑의 하계(下界). 그는 천장으로부터 세 단계의 그물코를 설치하고 있어요. 삼계를 따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세계로 엮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리스트비얀카>에서 보여준 ‘위 하늘의 무당나무’의 그물코와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어요. 그는 2층 전시공간을 통째로 <리스트비얀카>의 무당나무에 설치한 그물코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셈이죠.
그랬군요.
그렇습니다. 그곳은 그물코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대지와 하늘을 잇는 거룩한 성소와도 같아요.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행위는 대지에서 하늘로 오르는 ‘야곱의 사다리’를 닮았어요. 물론 그곳이 하늘은 아니겠으나 지상과 구별되는 곳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는 그가 수행했던 바이칼에서의 행위와 또한 바이칼을 오가며 사유했던 [대지(흙)-물-공기-불]의 4원소를 생각한 듯합니다. 색의 원소들과 빛의 원소들을 표현한 작품들은 그런 4원소의 변형일 수도 있겠고, 트리니타스(Trinitas)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의미의 실체는 조소희 미학사전에서 확인해야만 하겠으나, 이미 우리는 그것들의 상징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의 걸음이 또한 그랬을 것입니다. 나란히 배치해 놓은 신발 두 짝은 몸의 무게가 아니라 미학적 삶의 무게를 말하기 위해서겠지요.
그렇게 그는 오랫동안 실타래를 이어간 듯 보입니다. 그 세계야 말로 그가 살았고 살아가야할 숙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더군요. 그런 측면에서 그곳은 고치(cocoon)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가 들고나면서 쉼 없이 변태(metamorphosis)하는 공간으로서 말예요. 아니, 그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변태를 요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관객은 조용히 그곳에서 탈아(脫我)의 과정을 겪어야만 할 테니까요.
※ 이 글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산책』과 『월든』, 노자의『도덕경』제16장, 다비드 르 브로통의『걷기 예찬』, 가스통 바슐라르,『촛불의 미학』, 신석정의 시집『촛불』, 채호기의 시집『수련』, 고종석의『모국어의 속살』, 석도의『苦瓜和尙畵語錄』, 정희승의 단편소설「백지에 대한 지질학적 탐구」, 그리고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 독일의 철학자 니체,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일본 하이쿠의 대가 바쇼의 경구와 마지막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희생」이 은연 중 녹아있다. 굳이 각주를 달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차용하기도 했으나, 필자의 언어로 바꾸기도 하고 차용한 말들을 섞어서 다른 맥락 속으로 집어넣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언어가 상징하는 의미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